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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강남의 변천사(고려시대)

압구정 2008. 5. 10. 23:35

고려시대

고려시대 강남구 지역은 광주지역 일부에 해당되었다. 즉, 통일신라 때 9주(九州)의 하나인 한산주(漢山州)에 포함되었던 현 서울지방은 고려에 들어 한강 이북의 한산주(한양군)는 양주로, 한강 이남의 한주(漢州)는 광주(廣州)로 개칭되었던 것이다. 즉 고려 태조 왕건은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고 태조 23년(940)에 전국의 주·부·군·현(州·府·郡·縣)의 명칭을 개편하였는데 이때 한성(漢城)·한산(漢山)·한산주(漢山州)로 불리던 것을 광주(廣州)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태조 때의 주·부·군·현의 개명은 단순한 이름 바꿈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이 곧 새로운 지방통치제의 정비·확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태조가 비록 고려왕조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했다고 하나, 지방 각처의 호족들은 계속 후삼국의 혼란시대와 다름없이 독자적 무력기반과 경제적 기반을 보유하여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속에서 각 지방 주·부·군·현에 중앙통치권력이 미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따라서 태조 때의 주·부·군·현명의 개칭도 형식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었다. 각 지방은 그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의 자율적 통치에 맡겨져 있었으며, 중앙정부는 이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였을 뿐이었다. 이른바 호족연합정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호족세력의 득세는 지방통치의 제약이 될 뿐만 아니라 왕권의 약화를 초래하여 정국 불안의 가장 큰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태조는 즉위 초부터 꾸준히 호족들을 회유·억압하면서 왕권 안정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태조의 왕권강화책으로 대표적인 것이 결혼정책이었다. 태조는 6명의 왕후와 23명의 후궁을 맞았다( \고려사 ], 후비열전)고 했다.

고려 초기의 광주지역의 가장 강력한 호족은 왕규(王規)였는데, 그도 이러한 혼인정책에 따라 두 딸을 태조의 제15, 제16비로 들이게 되었다.
고려의 중앙정부가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해 본격적인 통제를 가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2년(983) 12목(十二牧)을 설치하면서부터였다. 물론 전년(前年)에 최승로(崔承老)가 외관(外官)의 설치를 건의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원(元)의 간섭 아래 들게 되면서 고려는 부마국의 체제를 강요받아 중앙통치기구와 함께 지방통치제도도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된다. 즉 충선왕(忠宣王) 2년(1310) 8월에 전국 주군(州郡)의 호(號)가 개칭되었던 것이다. 이때 모든 목(牧)이 혁파되어 부(府)로 강등되었는데, 광주목(廣州牧)은 지주사(知州事)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원의 간섭에서 벗어 나려는 반원정책이 전개되면서 모든 통치제도가 원 간섭 이전의 체제로 복구되었는데, 이때 부로 강등된 목이 원상회복되어 공민왕 5년(1356) 광주도 다시 목이 되었다.

고려 건국 초 최초의 왕위쟁탈전이 나타난 왕규의 난에서 보면, 왕규는 광주인이라 기록(고려사 권127 열전 제40 반역1)되어 있다. 이는 곧 광주를 기반으로 한 대호족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가계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각 지방호족과 같이 신라말 혼란기에 광주의 토착세력으로서 호족으로 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공민왕 10년(1361)에 왕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왕족과 대신을 거느리고 임진(臨津)나루를 건너고 한양을 지나 사평원(沙平原) 즉, 지금의 신사동 강변 언덕에서 눈물로 북쪽을 바라보며 언제 다시 이 나루를 건널 것인가 하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고려 후기 사평원의 모습을 읊은 이규보(李奎報)의 시가 있다.

피로한 말이 걸음도 느린데 길은 험하고 길다
안장을 부리고 애오라지 여기에 머무르리라
왕래하는 말들 길에 차 처음에 시끄러움을 싫어했더니
한 마리 학이 숲에서 울매 미소로 그윽함을 사랑하였네
만 길이나 나는 다리(飛橋)는 무지개가 꼬리를 둘렀고
천 척 늘어선 배는 얼새머리를 나란히 하였네
고인이 보이지 아니하니 슬픔이 더하다
떨어지는 해 아득한데 누에 기대지 마소

강 어구에 돛을 내리고 머뭇거리기 한참
맑은 물에 비춰보며 가만히 수염을 세어 보네
풀이 언덕가에 어울려서 겨우 학이 숨을 만하고
밀물이 강가에 옴에 오리를 영접하듯 하네

뱃사공은 앉아서 물이 깊고 얕음을 알고
나룻 사람은 능히 바람이 있고 없음을 점치네
급히 흰 비단을 찾아 그림을 그려야겠으니
한 쌍 한가한 오리 쇠잔한 갈대 속에서 졸고 있네

-신증동국여지승람-

 

자료출처 : 강남구청

출처 :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글쓴이 : 최홍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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