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일대는 구석기시대 이래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강변을 중심으로 전개된 한반도 선사문화의 중심부에 해당된다. 일찍이 구석기시대부터 한강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은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강가를 맴돌며 그들의 삶을 이어오고 있었다.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각종 짐승과 새, 물고기 등 먹거리가 넉넉했던 강가의 양지바른 곳이나 숲속 동굴을 살림터로 이용했던 그들의 자취는 남한강 상류에서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한강 하류까지 연결되고 있다.
강남은 특히 한강을 북쪽에 끼고 있는 구룡산과 대모산의 북서쪽 기슭이나 양재천 남북의 구릉 및 평야지대를 이룬 천연의 지형으로서 생활의 터전으로 삼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인근의 송파구, 강동구와 더불어 강남구에는 한반도 선사문화의 대표적인 유적들이 곳곳에 남겨져 있다. 역삼동(驛三洞) 지역은 한강변 구석기유물 출토지로 보고되어 있으며, 율현동(栗峴洞)에도 석기산포지가 있었고, 한강물이 마을 앞을 흐르던 압구정동의 옥곡(玉谷)마을 뒷산에서도 석기시대 돌도끼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약 7천5백년 전 쯤부터 후빙기의 추운 기후가 끝나기 시작하면서 신석기시대가 시작되고, 이때 서울과 한강가는 거의 지금과 비슷한 자연환경으로 되었다. 유적들이 큰 강이나 해안지역에 몰려서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물고기잡이에 큰 비중을 두고 살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약 3천년 전까지는 대체로 지금보다 따뜻했으며 그 뒤 청동기시대에 들면서 차츰 서늘해졌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서울 외곽의 계곡과 한강 유역에는 신석기 전기에 이미 사람들이 정착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들은 북쪽에서 들어온 소위 고아시아족의 일파로 추측되고 있다.
고고인류학총서(서울대: 1964)에 의하면 이들은 강북으로 남양주시 도곡리(陶谷里), 동막리(東幕里), 지금동(芝錦洞) 등지의 구릉 사면(斜面)이나 강변 모래땅에, 강남에서는 하남시 미사동(渼沙洞)·선동(船洞), 강동구 암사동(岩寺洞) 등의 강변 모래땅에 조그만 취락을 형성하고 살고 있었다. 청동기시대로 들어가면서 한강 하류지역은 단계적으로 형성되는 북문화권(北文化圈)과 남문화권(南文化圈)의 경계지대로서 새로운 문화적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서북한(西北韓) 청동기시대의 주류토기인 팽이토기(일명 角形土器)와 북방식 지석묘(支石墓)의 분포가 각각 한강선에서 머물고 있고, 서울 가락동(可樂洞)에서는 남한식 팽이토기라 할 수 있는 가락식 토기가 출현하고 있는 것으로 국립박물관 한국지석묘연구서와 김정학(金廷鶴)의 광주 가락리 (송파구 가락동) 주거지 발굴보고(古文化 2집)는 밝히고 있다.
1947년 7월, 당시 개포동 지명인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반포리(盤浦里)에서 청동기시대 유적인 지석이 발견되었다. 속칭 ‘고인고개’ 위의 서쪽 평탄한 솔밭에 지석 4개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는데, 규모가 큰 순서대로 A·B·C·D호로 구분하였다. 가장 큰 A는 웅대한 개석(蓋石)으로 한쪽 주석(柱石)이 도괴된 채 나지막한 주석 1개를 베개 삼아 비스듬히 쓰러져 있었다. 석재는 모두가 편마암인데, 그 개석은 부등변방형(不等邊方形)으로 남북이 3.6m, 동서의 제일 넓은 곳이 3.75m, 두께가 85m에 이르렀다. B는 A에서 서남쪽 24.5m 거리에 있었는데, 개석은 역시 한편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주석 1개는 땅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고, 지탱하고 있는 다른 한쪽 주석의 높이는 56㎝ 정도에 불과했다. 개석의 크기는 남북 3.40m, 동서 3.60m, 두께 35㎝ 가량이었다. A에서 서북쪽으로 22.6m 거리의 언덕께에 놓여 있는 지석을 C, 이 C의 동남쪽 6.8m되는 곳에 위치한 것을 D라 명했다. C, D의 개석은 모두 평평하나 땅 속에 묻혀 있었다. C의 개석은 부등변방형으로 남북 2.45m, 동서 2.49m, 두께 45㎝이며, D의 개석 또한 부등변방형으로 남북 2.80m, 동서 2.05m, 두께가 45㎝ 가량 되었다. 이 4개 지석은 모두 2개의 주석과 1개의 개석으로 구성되고 그 주석이 모두 낮았고 땅 속에 묻혀 있었다. 이로 보아 이들 4개 지석은 기반식(碁盤式) 지석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 4개의 지석묘가 모두 없어져 그 형태는 물론 위치가 어디쯤이었는지도 알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선사시대의 유적 특히 지석묘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그 자취를 찾을 길 없는 수 많은 유적들에 대한 아쉬움을 더하게 한다. 역삼동에서도 선사시대의 유물이 다량 발굴되었다. 역삼동 유적은 한강지류의 하나인 양재천변 역삼동 산 21의 1(현재 도곡동)의 표고 90m의 구릉상에 위치한 무문토기시대(無紋土器時代)의 주거지로 1966년 숭실대학교(崇實大學校) 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 일대는 표고 100m 내외의 야산 줄기가 이리저리 뻗은 준평원으로, 유적지에서도 약 10㎞ 전방에는 표고 544m의 청계산(淸溪山)이 있고, 동남방으로는 표고 283m의 구룡산이, 서쪽으로는 표고 290m의 우면산(牛眠山)이 바라보이는 곳이다. 유적이 있던 구릉은 청계산과 우면산 사이를 흘러 한강으로 들어가는 양재천을 끼고 있다.
주거지는 길이 16m, 너비 3m, 움의 깊이 50~60㎝ 크기의 장방형 수혈식(竪穴式) 주거지였다. 또 수혈 벽을 따라서 직경 10㎝~15㎝, 깊이 10㎝ 내외의 기둥 구멍이 1~2m 간격으로 나 있었으며, 그 중에는 기둥이 불탄 채 숯기둥으로 발견되었다. 서벽 중간지점과 동벽 북단쯤에 똑바로 서 있었는데, 굵기는 11~12㎝, 높이 20㎝ 내외의 참나무 숯이었다. 그러나 수혈 중간 부분에서는 기둥 구멍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또 노지(爐址)도 발견되지 않았다. 주거지 실내면적은 12평(약 48㎡)으로서 일반 생활인의 가옥으로서는 상당히 큰 집으로 보인다. 이들 역삼동 주거지의 연대는 청동기시대에 속하지만 미생식토기(彌生式土器)의 출현보다 더 내려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기원전 7세기~4세기 사이의 주거지로 간주된다. 청동기유적은 대개 구릉지대나 산의 경사면에 위치해 있다. 이들은 하천과 깊은 관계를 가지며 생활용수를 확보하고 본격적인 잡곡농사를 지었으며, 후기에 들어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벼농사의 시작은 청동기문화와 경제생활의 대표적인 특성으로 농경 발전과 사회 변화의 계기가 된다. 즉 사유재산 제도와 계급 관계가 발생되면서 고대국가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