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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강남의 변천사(조선시대)

압구정 2008. 5. 10. 23:30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행정구역을 8도로 나누어 관찰사(觀察使)를 두고 그 예하에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府·大都護府·牧·都護府·郡·縣) 등을 설치하였다. 이들 지방장관인 각 수령(守令)들은 행정상으로 모두 병렬적인 관계를 가지고 관찰사의 관할하에 있었으며, 단지 이들 수령이 겸임하는 군사직(軍事職)을 통하여 상하의 명령계통이 체계화되어 있있다. 그리고 각 고을과 두령의 계층적 차등편제는 집단부락의 크기나 인구와 호수(戶數)의 다소, 또는 전결(田結)의 규모에 따라 이루어졌다.

강남구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광주는 조선 중기까지는 23개 면을 포용하는 경기도 내의 가장 큰 고을이었다.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군사기지로 주목을 받았으며, 남한산성(南漢山城)은 중요 방어선이 되어 전란 때마다 격전지 방어성이 되었다. 광주의 별칭으로 고려 성종(成宗) 때 붙여진 회안(淮安)·광릉(光陵)이 있으며 남한산(南漢山)·한산주(漢山州)·한주(漢州)·봉국군(奉國軍) 등 삼국시대 이후 고려시대까지 불리던 명칭도 존속되었다. 현재의 강남구에 해당되는 광주부의 언주면과 대왕면에 관하여 기술한다. 조선시대 초기의 기록인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광주목 전체를 포괄하여 항목별로 서술하고 있어, 언주·대왕면 등 세분된 지역단위의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점이 아쉽다. 영조(英祖) 35년(1759)의 호구장부에 보면, 광주부의 행정구역은 23개 면 113개 이로 구획되어 있다. 언주면의 12개 이, 대왕면의 17개 이로서 언주면 전부와 대왕면 일부가 현재의 강남구지역에 포함된다.

언주면 소속 이(里)

 

신원리·역촌리·양재리·방하교리·포전리·무동도리·청담리·부로도리·반곡리·압구정리·논고개리·저자도리

 

 

대왕면 소속 이

노상리·송현리·사촌리·둔촌리·노하리·고산리·신곡리·세천리·지곡리·율현리·자양동리·수동리·궁촌수서동리·일원동리·둔전리·등자리·오야곡리
30년 후인 정조(正祖) 13년(1789)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광주부가 21개 면으로 대폭 축소되었다.

 

 

언주면의 경우

 

신원·포전리·반곡동·양재리·방하교·역촌·논고개·압구정·청담·저자도·무동도·부로도동 등 12개 마을

 

 

대왕면의 경우

 

고산동·율현동·노상동·수서리·대둔리·송현리·은곡리·노하동·신곡·등자리·하산동·둔퇴리·일원·자양동·지곡동·세천동·오야곡·사촌리 등 18개 리로 구성되어 있어 약간의 변동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작성시에 기록되어 있는 광주군의 인구는 호 1,435에 구 3,110이다. 이 숫자는 정군(正軍)과 봉족(奉足)을 합한 전 병정수(兵丁數)를 나타낸 것이다.
이후 1759(영조 35)년 기준(기묘장적)의 통계를 보면 호 11,713, 구 54,709(남:23,398, 여:31,311)이었다. 그 후 1789(정조 13년) 기축장적 통계에 의하면 광주는 호 10,568, 구 50,508(남:24,402, 여:26,106)으로 영조 35년보다 감소되고 있다. 또한 1836년(헌종 2년)의 병신장적에는 호 10,492, 구 50,045(남:22,751, 여:27,294)로 나타나 있다.

 

다음은 강남구지역에 해당되는 언주면과 대왕면의 호구상황이다.

조선시대 강남지역 인구수 추이

 

영조 35년(1759)의 언주면·대왕면의 이별 호구수(輿地圖書)

 

 

 

▶언주면(12개 이)

 

신 원 리

180

인구

1,031(남:328, 여:703)

역 촌 리

75

인구

280(남:135, 여:145)

양 재 리

60

인구

355(남:143, 여:212)

방 하 교 리

56

인구

266(남:109, 여:157)

무 동 도 리

23

인구

79(남: 33, 여: 46)

포 전 리

71

인구

347(남:134, 여:213)

청 담 리

45

인구

265(남: 74, 여:191)

부 로 도 리

49

인구

173(남: 62, 여:111)

저 자 도 리

7

인구

21(남: 10, 여: 11)

반 곡 리

74

인구

379(남:150, 여:229)

압 구 정 리

157

인구

903(남:441, 여:462)

논 고 개

67

인구

306(남:115, 여:191)

 

 

 

▶대왕면(17개 이)

 

노 상 리

33

인구

161(남: 56, 여:105)

송 현 리

26

인구

129(남: 63, 여: 66)

사 촌 리

63

인구

376(남:136, 여:240)

둔 촌 리

78

인구

462(남:223, 여:239)

노 하 리

27

인구

204(남: 60, 여:144)

고 산 리

35

인구

157(남: 73, 여: 84)

신 곡 리

38

인구

112(남: 41, 여: 71)

세 천 리

30

인구

142(남: 72, 여: 70)

지 곡 리

122

인구

538(남:224, 여:294)

율 현 리

44

인구

210(남: 78, 여:132)

자 양 동 리

23

인구

96(남: 29, 여: 67)

수 동 리

23

인구

124(남: 45, 여: 79)

궁촌수서동리

70

인구

295(남:112, 여:183)

일 원 동 리

31

인구

112(남: 52, 여: 60)

둔 전 리

24

인구

129(남: 68, 여: 61)

등 자 리

63

인구

299(남:113, 여:186)

오 야 곡 리

46

인구

187(남: 95, 여: 92)

 

▶생산물과 상업활동

당시 강남지역은 한강변을 중심으로 농업 위주의 경제생활을 영위하였으며 수산업에도 종사하였다.
특히 이 지역의 수산물로 압구정 앞 한강에서 나오는 민물게(蟹密魚)는 궁중에 바치는 특산물로 유명하였으며 공급의 어려움으로 보장고(保障庫)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밖에 붕어, 쏘가리 등이 유명하였으며 청담도선장을 통해 강북으로 수송되었다.

과실로는 앵두(櫻桃)가 유명하였으며 언주면 일대는 앵두재배의 최적 토양이었다고 한다. 생지황(生地黃), 금은화(金銀花)도 언주면에서 생산되었으며 대모산에서는 절치목(節治木)이 특산물로 손꼽혔다.
강남구의 동쪽 경계를 이루는 탄천변에는 둘레 1,237척, 높이 5척의 율현제언(栗峴堤堰)이 축조되어 물의 범람을 막고 농경용수의 적절한 공급을 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에 강남구 지역에는 장시로 사평장(沙平場)이 있었는데, 사평도(沙平渡)를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었으나 그 실세는 송파장(松坡場)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이들은 도성의 사상도고인(私商都賈人: 개인도매상)들과 일정한 결합관계를 가지며 국내 상업활동의 한 줄기를 형성하였다. 이 지역의 상권은 향시(鄕市)로서의 성격과 도성(都城)으로 상품이 반입되는 최종 집적지로서의 성격이 결합되어 사실상 서울지방 사상도고의 대자본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다.

조선왕조 후기에 와서는 서울의 인구가 증가하고 상권이 확대됨으로써 새로운 시전(市廛)도 많이 증가되었지만 시전상인 이외의 사상인층 즉 난전상인(亂廛商人) 또한 증가해 갔다. 시전상인들이 정부로부터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통한 보호를 받는 대신 그 대가로 정부로부터 경제적 혹은 경제외적 제약을 많이 받는데 반하여 사상인층은 오히려 자유스럽게 상업활동을 할 수 있는 일면이 있었다. 시전상인들이 금난전권에 의지하여 소극적이고 고식적인 상업활동을 유지한데 반하여 사상인층은 금난전권에 대항하면서 당시 내외적인 상업발전 현상을 배경으로 오히려 적극적이고 폭 넓은 상업활동을 벌이면서 자본축적에 성공해 갔다. 시전상인들이 특권적 매점상업, 즉 도고상업을 벌인데 반하여 사상인층은 스스로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매점상업을 발전시켜 나갔으니 여기에 사상도고가 자연히 발전하게 된 것이다.

▶육의전을 위협하는 송파와 사평장

이 시기의 송파장터를 두고,

“명목상으로는 한 달에 여섯 번 장이 선다지만 실제로는 서울 시전에서 파는 상품과 같은 것을 마을 안에 쌓아 두고 매일 매매하였으므로 서울의 시전상인들이 이 때문에 해마다 이득을 잃어가는 실정이라.”

하였으니 이미 정기시장이 아니라 상설시장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5일에 한번씩 서는 정기시장이 일반적이었으나 상업활동이 발달함에 따라 일부 장시들이 점차 상설시장화해 간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장시에서 매매된 상품은 곡물과 상업적 농작물, 수공업제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와 같이 유통이 시대적 요청이 되어가자, 물화를 대량으로 취급하는 개인상들에 의한 자유상업 또한 활발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교통의 요지나 물자의 집산지에는 숙박과 판매, 알선의 역할을 겸했던 객주(客主)나 여객(旅客) 등이 대동법 실시 이후 활동한 공인(貢人:국가에서 인정하는 상품유통기능 담당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번성했다.

한편, 국가는 어용에 이바지하는 시전상, 즉 육의전(六矣廛)을 보호하고 물가상승을 막기 위해 일반인의 상행위를 강력히 규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업의 자유화 경향은 국가 차원의 금령으로 지켜질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18세기 영조대에는 금령을 무시하고 도성 부근에 소상인과 소상품생산자에 의한 3대 시장이 나타나게 되었고, 결국 금령조차 폐기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 속에 특히 송파와 사평장은 육의전 상인을 크게 위협했고, 조정에서는 이들의 자생적 발전을 억제하려는 논의가 활발했다.

16세기 경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장시는 봉건정부의 억압정책에도 불구하고 계속 발달하여, 19세기 전반 순조대에는 전국 장시가 1,061개소를 헤아리게 되었는데, 이는 화폐유통의 일반화와 도로 및 운송수단의 발달에 힘입은 것이었다.

▶교통과 역원제도

국가의 공문서의 전달, 변경의 중요한 군사정보 및 사신의 왕래에 따라 영송과 접대 등을 위한 교통수단으로 역원제도가 운영되었다. 이를 역참(驛站) 또는 우역(郵驛)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역참은 군사·외교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지방통제를 위한 행정적인 측면에서의 중앙집권국가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국시대부터 비롯된 역참이 전국적으로 조직·운영된 것은 고려시대이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고 부분개편했는데, 전국의 도로를 망라하여 대·중·소로 등급을 정하고 관할구역을 정해 역을 설치하고 역원을 배치하였다. 강남구지역에는 조선시대 삼남으로 연결되는 양재역이 있었으며 한강 남안에 사평원(沙平院)이 운영되었고, 그 변형 형태인 참점(站店)으로 신원점(新院店)과 율현점(栗峴店) 등이 있었다.

강남구 지역에 있던 양재역의 경우 고려시대에는 양재(良材)로 표기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광주부 서쪽 40리 떨어진 언주면에 위치하였던바, 대로에 속하였던 양재역은 문관 6품직인 찰방(察訪) 1인이 배치되었다. 양재역은 처음 과천(果川)에 속하였는데, 언제 광주부에 속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며 조선 말기에는 수원(華城) 영화도(迎華道)의 속역(屬驛)이 되었다. 1759년 당시 양재역에는 마필 27마리와 노비 27인이 소속되어 있었다.

한편, 공무 여행자들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각 요로(要路)에 원(院)이 설치되었다. 원은 대개 역과 같은 장소에 설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원이 언제부터 설치되고 운영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사신의 왕래처에 관(館)을 두었던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1,310개소의 원이 설치·운영되었는데, 강남에는 양재역과 함께 사평나루에 있던 사평원을 들 수 있다. 원의 경영책임자는 부근의 주민 가운데 승려와 향리, 관리로서 대로는 5호, 중로는 3호, 소로는 2호를 원주(院主)로 임명하였다. 이들에게는 잡역이 면제되고 운영경비로 원주전(院主田)이 차등 있게 지급되었으며, 한성부와 관찰사가 이를 감독하였다.

원은 공무 여행자뿐 아니라 때로는 일반 행인에게도 휴식과 숙식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교통사정이 원활하지 못했던 당시에 여행자를 도둑이나 맹수로부터 보호하거나 굶고 병든 사람을 구제하는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관리가 철저하지 못해 폐지되기 일쑤여서 공용여행자의 숙식을 각 역이나 민간에 일임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그 기능이 거의 마비상태에 놓이게 되고, 그 복구대책으로 파발제(擺撥制)를 운영하게 되었다. 즉, 봉수제(烽燧制)가 순수한 군사통신수단으로 운영이 어렵게 되자 전령(傳令)을 주로 담당하는 파발제가 실시되었다. 파발은 기발(騎撥)과 보발(步撥)로 운영되었는데 기발은 매 20리마다 1참을 두고 보발은 30리마다 1참을 두었다.

파발의 조직은 전국적으로 크게 서·북·남의 3대 간선으로 구분되는데, 서남간선(西南幹線)에서는 남간(南間)에서 갈라지는 간선로(間線路)가 있었다. 서발(西撥)은 1개의 간선(幹線)인 기발노선과 2개의 간선(間線)인 보발노선이 있는데 기발노선은 서울에서 의주(義州)간으로 참수(站數)가 41개 있었고 평산(平山)·해주(海州)로 이어지는 보발노선은 참수가 5개, 박천(博川)·압록강변의 여러 읍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간선은 참수가 43개 있었다.

북발(北撥)은 1개의 간선(幹線)과 1개의 간선(間線)이 있었는데 간선(幹線)은 보발로서 서울에서 경원(慶源)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참수는 64개가 있었고, 간선(間線)은 서울에서 북청(北靑)·삼수(三水)로 이어지는 것으로서 보발이었는데 참수가 10개가 있었다.

남발(南撥)은 보발로서 간선(幹線)이며, 서울에서 동래(東萊)까지 이어지는데 참수는 31개였다.
이들 3개의 노선 중 서울에서 동래까지 이어지는 남발이 강남구지역을 거치게 되는데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보면 이 노선의 공식명칭은 동남지동래대로보발(東南至東萊大路步撥)로서 인근 경유지는 경도(京都)~신천참(新川站, 때로는 松坡站:강남구 新川洞~율목창(栗木倉, 때로는 陰寸站:강남구 細谷洞~검복참(黔伏站:광주군 중부면 검복리~경안참(慶安站, 광주면 경안리)~쌍교참(雙橋站)~이천(利川)으로 이어졌다.

강은 삼남지방으로 이어지는 대로가 나있고 한강 조운로(漕運路)가 통하는 지역으로 강북의 한강진(漢江津)과 이어지는 강남의 사평도(沙平渡)에 원(院)이 설치되어 여행자들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또한 광주부 서쪽 35리 지점 언주면에는 신원점이 있어 남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는 판교(板橋)와 북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는 한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가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광주부 서남 25리 지점 대왕면에는 율현점이 있어 역시 남으로 20리 거리에서 판교와 이어지고, 동남으로 15리 거리에 추령(秋嶺)이 위치하였는데. 이는 용인(龍仁)에 이르는 통로가 되는 한편 북쪽으로 15리 거리에 있는 삼전도(三田渡)를 건너 서울에 입성할 수 있는 길이었다.

 

자료출처 : 강남구청

 

출처 :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글쓴이 : 최홍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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