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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강남의 변천사 (일제시대)

압구정 2008. 5. 10. 23:30

일제시대

1910년에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는 구한국말의 지방행정제도와 행정구역, 즉 12개 부(府), 137개 군(郡)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한다. 당시 경기도는 경성부(京城府)·인천부(仁川府)의 2개 부와 36개 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늘의 강남지역과 관계되는 광주군은 18개 면, 과천군은 7개 면이었다.

광주군(廣州郡;군청소재지 郡內面)

 

군내면·동부면·퇴촌면·경안면·실촌면·도척면·세촌면·송마면·오포면·대왕면·왕현면·왕륜면·의곡면·언주면·중대면·서부면·구천면·초월면(18개 면)

 

 

과천군(果川郡:군청 소재지 郡內面)

부내면·동면·상서면·하서면·남면·상북면·하북면(7개 면)

 

 

그런데 총독통치 3년이 지나며 기틀이 잡혀가자 조선총독부는 1913년 10월에서 14년 4월에 걸쳐 대대적인 지방제도 개혁을 단행하고 1914년 3월 1일과 4월 1일을 기해 일제히 실시에 옮긴다. 1914년 3월 1일에 단행된 감축으로 경기도 내에서도 16개 군이 폐합되어 없어지고, 종전까지의 36개 군 중에서 20개 군만 남게 된다.
이렇게 군의 폐치분합을 단행한 조선총독부는 3월 중에 면의 폐합도 지시하는데 이 지시에 따라 경기도는 3월 13일자 경기도령 제3호 ‘면의 명칭 및 구역’을 발표하여 종전까지의 많은 면을 폐치분합한다. 예컨대 고양군 용산면(龍山面)과 서강면(西江面) 그리고 연희면(延禧面), 여의도(汝矣島)를 합하여 용강면(龍江面)으로 하고 동대문 밖 숭신면(崇信面), 인창면(仁昌面)을 합하여 숭인면(崇仁面)으로 하는 식으로 폐합되었다.
이때에 단행된 폐치분합으로 오늘날 강남지역과 관계된 광주군·시흥군 내 각 면의 폐합상황은 아래와 같다.

▶광주군
중부면:군내면 내에서 서부면 구역에 속하지 않는 지역, 세촌면(細村面) 내에서 돌마면(突馬面) 구역에 속하지 않는 지역
동부면:동부면 내에서 서부면 구역에 속하지 않는 지역
퇴촌면:퇴촌면 일원, 서월면 무수동·정자동·원당동
경안면:경안면 일원
초월면:초월면 내에서 퇴촌면 구역에 속하지 않는 지역
실촌면:실촌면 일원
도척면:도척면 일원
돌마면:돌마면 일원, 세촌면 하대원리
오포면:오포면 일원
낙생면:낙생면 일원
대왕면:대왕면 일원
언주면:언주면 일원
중대면:중대면 일원
서부면:서부면 일원, 군내면 천암동·법화동, 동부면 상사창리·하사창리
구천면:구천면 일원
남종면:남종면 일원

▶시흥군
북면:상북면 일원, 하북면 일원
동면:동면 일원, 군내면(박달리 제외) 일 원
서면:군내면 박달리, 서면 일원, 남면 일원
신북면:원 과천군 하북면 일원, 원 과천군 상북면 동작리·사당리
신동면:원 과천군 상북면 내에서 신북면의 구역에 속하지 않게 된 지역, 원 과천군 동면(주암리 제외) 일원
과천면:원 과천군 동면 주암리, 원 과천군 군내면 일원
서이면:상서면 일원, 하서면 일원
남 면: 원 과천군 남면 일원
수암리:원 안산군 군내면 일원, 인화면 일원, 초산면 일원
군자면:마유면 일원, 대월면 일원, 와리면 일원

이상과 같이 군면의 대폭적인 폐치분합을 단행한 조선총독부는 이어서 그해(1914) 4월 내에 자연부락을 묶어 이·동체제를 갖추었으며 이어 그해 9월에 각 면에 면사무소를 두게 된다. 사실상 그 이전까지는 뚜렷한 면사무소도 없이 면장(호칭도 여러 가지였음)의 사택(私宅)이 곧 면사무소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경기도는 1914년 9월 4일자 경기도고시 제46호로 도내 각 면의 사무소 위치를 고시하였는데 언주면사무소 소재지는 염곡동, 대왕면은 괴하동이었으며 신동면은 우면리였다.

당시의 시흥군 신동면, 광주군 언주면· 대왕면의 모습은 전혀 조사되어 있는 바가 없다. 1925년의 국세조사와 1944년까지의 인구상황과 직업별 인구수 등의 통계로 강남지역을 더듬어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강남과 서초 일대의 인구수는 1925년에 약 2만명에서 1940년에 23,237명, 그리고 광복 한해 전에는 23,661명으로 당시 한반도 농촌지역의 평균적인 모습이었다.
이 지역은 나루를 이용해 서울에 접근했지만, 지리적으로 서울에 가까워서 다수의 일본인이 농사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동양척식(주)의 소유인 전답을 대부받아 직접 농업경작을 하거나 조선인의 전답을 사들여서 소작을 시켜 지주노릇을 하였는데 주로 배밭 경영자가 많았다.

1930년 국세조사보고서에 의하면 광주군내에는 모두 368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중 4분의 1인 90명이 언주면에, 70명이 신동면 잠실리에 거주했다. 이는 아마도 이곳이 서울에서 가까운 농촌인데다 누에치기 등을 지도·감독하는 요원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광주군 인구 총수 83,827명 중 88.6%에 해당하는 29,495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이 중 자작이나 소작 등 농경업주는 13,389명뿐이고 나머지는 머슴을 위시한 농업 노무자들이었으니 당시 이들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농경업주 중에는 과수재배업이 1,796명으로 13.4%를 점하고 있어 이 지역 다수가 과수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료출처 : 강남구청

출처 :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글쓴이 : 최홍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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