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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강남의 변천사(통일신라 이전)

압구정 2008. 5. 10. 23:37

통일신라 이전

목축과 농경을 통한 생산력의 증가는 인구증가와 더불어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분업을 발생케 하였으며, 이는 사회조직과 정치조직을 이루는 배경이 되었다. 즉 씨족사회의 족장세력은 점차 잉여생산물을 독점하고 금속기문명의 혜택을 우선적으로 향유함으로써 전사단(戰士團)을 가진 지배계급으로 정착하였으며, 하부 족원(族員)들은 생산담당자로서의 기능을 가지는 사회문화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회문화는 씨족사회를 벗어나 부족사회, 나아가 부족연맹체사회로 발전하였는데, 사회 내부적으로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일정한 신분체제를 구축하여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통치조직을 만들었으며, 외부적으로는 다른 사회·정치세력과 대립·경쟁하여 생존을 위한 공동체로서 일정한 지역에 지배권을 행사하는 정치집단을 형성케 하였다.
한강 이남의 정치세력의 존재는 이 지방에 지석묘 발달과 때를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석묘의 존재는 족장권(族長權) 즉, 군장(君長)의 정치세력이 그만큼 컸으며, 또한 세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지석묘 건립을 위한 노동력의 동원체제를 구축했던 정치조직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강남 일대 한강유역을 무대로 최초의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은 진국(辰國)이다. 기원전 2세기 초 만주지방에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가 국가체제의 정치조직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 한강 이남에서는 진국이 문화적 통일성을 가진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기원전 3, 4세기부터 꽃피고 있던 철기문화는 이때 고조선지방으로부터 유입된 유이민들을 통해 더욱 발달되었고, 이로써 진국사회는 더욱 분화·발전되어 한강 이남지역에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의 삼한(三韓)연맹체가 등장하게 된다.
이 시기를 역사에서는 삼한시대라 한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강남지역에는 기원전 1세기 중엽까지 마한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초기 백제국(伯濟國)은 마한 54개국의 하나로 북방유민들이 현 서울지방인 한강유역에 자리잡은 군장사회였다. 여기서 백제국의 세력이 점차 확대됨에 따라 진왕(辰王)이 맹주가 되었던 마한연맹체(馬韓聯盟體)는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화되었고, 종국에는 기원전 1세기말 백제국이 마한을 정복하고 초기 고대국가인 백제(百濟)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국을 이룬 중심세력은 서울지역에 정착했던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집단인 온조계(溫祚系)이다. 이들은 한강유역의 경제성을 이용하여 보다 많은 생산활동과 인구 증가를 이루었고 보다 큰 정치집단을 형성했던 것이다.
백제 시대 강남지역은 위례성 외곽으로 낙랑지역과 통하는 길목이었다. 초기에는 낙랑(樂浪)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선진문화를 받아들였으나, 얼마 안 가 적대관계에 들어가는 바람에 진출과 방어의 역할을 함께 해야 했다.
백제는 4세기 중엽 근초고왕대에 전성시대를 이루나, 백제의 침공을 받았던 고구려가 내적으로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남하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여, 372년 이후 백제의 도읍지였던 한강유역의 서울지역은 양국의 각축장이 되었다. 결국 475년 고구려 장수왕 때 백제는 5세기 동안 지켜오던 한강유역을 고구려에 내주게 되고, 이후 77년간 한강변 서울지방은 고구려의 통치하에 들어간다.
6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신라가 국가체제를 완성하고 정복국가로 발전하였다. 진흥왕은 백제의 성왕(聖王)이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 옛 영토를 회복하려고 하자 그와 동맹을 맺고 북진하여 한강하류 6군을 점령하였고, 2년 후인 553년 고구려로부터 수복한 백제의 한강하류지역을 기습공격해 독점하기에 이른다. 이후 이곳은 각종 자원과 지리적 이점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공방전은 676년 신라의 통일국가가 이룩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신라는 전국에 9주를 설치했고 강남구를 포함한 서울지방은 한산주(漢山州)에 편입되었다. 한산주는 경덕왕 16년(757) 지금의 서울지방에 한양군을 설치하면서 한주(漢州)로 개칭되었다.
9세기말 진성여왕(眞聖女王) 대에 이르러 신라 정국의 혼란은 극에 달하게 되고 후삼국이 출현하게 된다.
이렇게 초기 정치세력의 성장과정 속에서 강남구 지역은 진국(辰國), 마한(馬韓)의 백제(伯濟), 고대국가 백제(百濟)의 영역에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다.
892년 견훤이 완산(完山)에 웅거하여 후백제(後百濟)라 칭하였고, 북원(北原)· 명주(溟州)를 거쳐 철원(鐵原) 등 인근 70여 군현을 공략한 궁예(弓裔)는 패서지방 세력의 항복과 896년 개성(開城)의 왕건(王建) 부자가 귀부해옴으로써 그 세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898년 궁예 휘하인 왕건이 양주(楊州)와 견주(見州) 지역을 공략하고 패서도(浿西道)와 한주(漢州) 관할 30여 성을 장악하니 지금의 서울지역은 궁예의 세력권에 들게 되었다. 이어 918년 왕건이 국왕에 추대되어 고려왕조를 개창함에 따라 한양군(漢陽郡)은 고려에 편입되었으며 태조(太祖) 23년(940)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성하고 군현호(郡縣號)를 개칭함에 따라 한양군은 양주로, 한주는 광주(廣州)로 편제되었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강남구 삼성동에 있던 삼국시대의 토성인 삼성리산성(三成里山城)에 관한 것이다. 이 토성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조선고적조사보고(朝鮮古蹟調査報告:1917)에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을 뿐이다.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성리산성: 언주면에 있다. 북쪽은 한강에 접하고, 강을 사이에 두고 뚝섬 방향을 내려다 보는 산성으로 토축(土築)이다.
이 삼성산(三成山) 토성 자리는 현재의 영동대교를 건너 왼쪽으로 봉은사(奉恩寺) 가는 방향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강과 인접해 있는 유일한 낮은 산에 있다. 그 후 이들 성에 관한 기록이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조사기록이 남겨져 있다.
성지(城址):언주면 삼성리 봉은사 동북쪽에 있다. 연장선 170칸, 높이 약 1칸의 토루(土壘)가 산복(山腹)을 에워싸고 한강에 임하였다.

1942년에 조사된 당시의 이 간단한 기록 외에는 이 산성에 대한 다른 조사 기록은 발견되는 것이 없고, 그 후 여러 학자에 의해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남겨진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 동안 이 산은 강변도로나 기타 도로건설로 인해 파괴되고 또 주택 등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어 현재로서는 토성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이 토성이 파괴되기 전에는 단(段)을 가진 축성(築城) 형태가 명확하게 산허리를 둘러싸고 있었으며 정상부에는 수많은 고려시대 기와편과 장대석(長大石)이 흩어져 있어, 한때 고려의 장원이나 작은 사찰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건조물에 대한 기록 등도 현재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산성은 한강나루를 지키는 백제시대 수비성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자료출처 : 강남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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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최홍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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