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는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길이 없고, 다만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에 압구정 터임을 알리는 표석만이 서 있을 뿐이다. 위치는 압구정1동 456번지 일대이다. 한양 팔경의 하나였던 압구정자의 모습은 이제 겸재의 그림으로만 느껴 볼 수 있다. 1484년 한명회가 그의 나이 70세로 궤장(机杖)을 하사받고 물러나 압구정에서 여생을 보낼 때 성종이 친히 압구정시를 지어 내렸고, 조정의 여러 문사들도 어제(御製)에 화운(和韻)하여 수백 편의 시가 빚어졌다고 전한다. 압구정이란 이름은 한명회의 부탁을 받은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이 지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선 왕성에서 남쪽으로 10리 쯤에 물이 있는데 한강이라 한다. ……그 강은 넓고 파도가 아득하여 바람 돛이 오가고 갈매기 오르내리니 마음이 시원하고 경치가 다함이 없어 황홀히 몸을 창해에 머문 것 같다. 내 이름 짓기를 압구라 하고, 이르기를 갈매기는 물새로서 한가한 새라, 강이나 바다 가운데 빠졌다 떴다 하고 물가나 섬 위에 날아다니는 것으로 사람이 길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어찌 가까이 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위태로운 기미를 보면 바로 날아 떠오르고 공중을 휘날다 내려앉는 것이니 새이면서 기미를 보는 것이 이같은 까닭으로 옛적에 해옹(海翁)이 아침에 바다로 나갈 적에 갈매기가 이르러 도는 마리 수를 백으로 헤아린 것은 기심이 없는 까닭이요, 붙들어 구경하고자 함에 미쳐서는 공중에서 춤추며 내려오지 아니하니 그것은 사람의 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오직 기심이 없으면 갈매기도 자연히 서로 친하고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이다. ……만물의 정은 반드시 기심이 없는 뒤에라야 서로 느끼고, 만사의 이치는 반드시 기심이 없는 뒤에라야 서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털끝만치라도 사심이 붙어 있게 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기심이 진실로 없게 되면 조정에서는 사람들이 더불어 친하기를 즐기지 아니할 사람 없고, 이 정자에 오를 적에는 갈매기도 더불어 한가히 반겨하지 아니함이 없느니라. 이욕과 관록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관계가 없는 것같이 한다면 이는 도에 나아감이 높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정자를 이로써 이름 짓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것이다. ……
일찍이 구양수(歐陽修)가 시를 읊어,
험난하거나 평탄하거나 한 절개는 금석과 같아 공훈과 덕이 함께 높아 예나 지금이나 비치네 어찌 기심을 잊어 갈매기가 믿는데 그치리 만물은 다스리는 것인즉 본래 무심함에 있거늘 하였듯이 내가 공에게 바라는 것도 자못 이와 같다.
정자가 낙성되던 날에는 왕을 위시하여 조야의 문호들이 시를 지어 주인공의 덕을 기리고 낙향을 축하하였다. 한명회와 합심하여 세조(世祖) 즉위에 공이 많았던 범옹(泛翁) 신숙주(申叔舟)는 압구정시를 지어 주인공의 공적을 찬하였다.
손으로 해수레를 떠받들어 하늘길을 바로하니, 하늘을 돌리고 별을 굴리는 일 한번 돌아보는 동안이었다. 빛나고 빛나는 공훈과 이름 한 몸에 다 모였으니 소하·장량(蕭河·張良)과 구순(歐恂), 등우(鄧禹)를 세어 말할 것이 없다네
높은 벼슬 우연히 온 것이지 기약한 일 아닌 것이 세월은 흘러만 가고 머물지 않는다
한 평생의 맑은 운치를 임천(林泉)에 붙여 보려고 높은 정자 새로 지어 강가에 서 있다
마음을 알아주는 이 흰 갈매기뿐인 것이 날고 울며 서로 따르니 한가롭기만 하구나
옥 패물을 버리고 난초(蘭草), 지초(芝草) 꿰어 차니 강 위의 잔잔한 물결이 제멋대로 출렁거린다
공을 이루고 이름 날리니 번화함이 싫어져서 아침 저녁 그윽한 생각으로 강가를 거닌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중 누정조(樓亭條)
당대 중국 명사들의 시를 받아와 국내 명사들의 시와 함께 현판에 새겨 정자 위에 걸어 놓았으니 호화스러움이 도리어 자연풍경에 누가 될 정도였다. 그리하여 권신세가 한명회의 행동을 위선으로 보아 비웃는 이가 많았다. 특히 성종조의 문신으로 한명회의 전횡을 달갑지 않게 여기던 최경지(崔敬止)는 다음과 같은 압구정시를 지어 한명회의 관욕(官欲)을 꼬집었다.
세번 찾아 부탁하는 임금의 은총 깊으니 정자 있으나 와서 놀 길 없다네 가슴 가운데서 공명심만 없어진다면 환해(宦海) 앞에서도 갈매기를 친압할 수 있으리
이 시에 대한 평판은 엇갈린다. 수백편의 압구정 시 중 백미로 꼽는가 하면, 정작 한명회는 이 시가 너무 싫어서 현판하는 데서 제외시켰다고 한다. 서민시인 이윤종(李尹宗)도 이곳을 지나치다 한명회의 인간성을 풍자하는 장편시를 지었는데, 그 말미는 다음과 같다.
정자는 있어도 돌아가지 않으니 인간으로서 정말 원숭이 목욕시킨 것이다
주인인 한명회에 대한 평가는 이렇듯 양면이 있었으나. 한강 명승지에 자리잡은 압구정에는 계속 명사들과 풍류 시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고, 많은 명시들이 남겨 전해지게 되었다 이 시를 통해 옛날의 풍경을 느껴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이다.
송당집(松塘集)에 이르기를,
강 위에 좋은 자리 골라 화려한 집 지으니 백척이나 높은 누대에 구름과 물이 한가롭다 갈매기야 사람의 마음을 어이 알 수 있으리 푸른 난간 저 밖으로 날아서 오간다
라고 하였는가 하면 석북집(石北集)에는
묻노라 강 위의 갈매기야 한상국(韓相國)을 본 일이 있느냐 갈매기야 주인은 알아 무얼 하나 다만 봄 물이 좋아 떠 있다네
라 읊었다. 상전벽해라고 하였거늘 압구정의 풍경도 불변일 수 없었다. 순조 때(1801~1834)의 문인 몽촌 박봉의(夢泉 朴鳳儀)와 어당 이상수(李象秀)의 압구정시 대목대목에서 세월이 흐르면서 호화롭고 한가롭던 입구정도 차츰 변모해 갔음을 알 수 있다.
여덟 신선 술을 들며 강을 마주 앉아 노는데 요란한 매미 소리 가을을 알린다
승상이 한가한 곳 차지하여 새 별장 마련한 것이 중국에도 좋은 경치 알려진 옛날의 명루(名樓)라네 비단발 높이 걷으니 삼산(三山)이 저기인데 순풍에 돛단배는 두물머리로 지나간다
석양녘 연기가 방초 언덕에 깔리니 여기서 옛 시인들 한가로운 수심을 달랬다
-대동시선(大東詩選) 몽천시(夢泉詩)
황량한 언덕에 말을 매고 혼자서 서성거리는데 부원군의 이름난 정자가 풀속에 들어 있다
강물의 기세는 동쪽 산기슭을 훑어 오고 산악의 형태는 한양을 다 둘러쌌다
강갈매기는 지금도 훨훨 날아드는데 두견새 울음소리 옛부터 사람의 애를 끓는다네
날 저무니 연기와 물결 끝간 데 없는 것이 육신사당(六臣祠堂) 아래는 더욱 아득하구나.
-대동시선(大東詩選) 오당시
압구정은 저자도와 함께 철종의 딸인 영혜공주와 결혼하여 금릉위가 된 박영효(朴泳孝)에게 하사되었으나, 갑신정변에 역적으로 몰려 한 때 몰수되었다가 고종 말년에 다시 그에게 돌려진다. 정자가 없어진 연유와 시기는 알 길이 없고 압구정 서쪽에는 수은 홍석보의 숙몽정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터마저 찾아 볼 길이 없다. 홍석보는 경종 원년에 동부승지로서 당시 노론 사대신과 함께 세제책봉을 주청했던 인물이다.
자료출처 : 강남구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