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공원의 안창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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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 혁명 강조한 민족의 선각자 도산공원에 모셔진 영원한 교육자 도산 안창호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1878∼1938). 교육을 통하여 민족혁신을 이룩하려 했던 그의 사상과 실천은 바래지 않고 한세기에 걸쳐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사회, 문화, 교육 모든 분야에 걸쳐 나타났던 그의 사상의 핵심은, 민족혁신은 자아혁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아혁신은 곧 인격혁신을 말하는데, 이를 위해 무실역행(務實力行)과 주인의식을 먼저 강조했다. 그는 성실이야말로 인간이 믿고 의지해야 할 기본원리로 믿었고 점진성, 즉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차근차근 개척하여 향상을 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해왔다. 그는 평안남도 강서군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흥국(興國)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선대는 대대로 평양 동촌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대에 도롱섬으로 옮겨왔다. 9살에서 14살까지는 강서군 심정리에 살면서 한학을 배웠다. 이때 서당 선배인 필대은(畢大殷)과 알게 되어 그로부터 민족주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받았다. 17살 되던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국력배양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상경하여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경영하는 구세학당에 입학, 신학문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이곳에서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인생의 좌표를 그린다. 이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평양에서 관서지부 조직을 맡게 되었다. 독립협회 평양지회 결성식 연설 때, 그는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열아홉의 나이로 많은 군중 앞에서 ‘18조목의 쾌재(快哉)와 18조목의 부재(不哉)’를 들어 정부와 관리를 비판하고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세인의 주목을 받는다. 2년 후에는 고향 강서에 이 지방 최초의 근대교육기관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고, 1902년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그는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를 조직하고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행하면서 교포들의 생활향상과 의식계몽운동에 힘을 기울인다. “빼앗긴 나라를 찾는 일은 그것이 더딜지라도 참고 견디면서 자기혁신을 이루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는 무실역행 즉, 참되기를 힘써 행할 것을 강조하며 사랑을 깨우치기에 노력했고, 그것을 작은 일부터 실천하도록 지도했다. 도산이 미국으로 건너가 교포들과 생활할 때의 일이다. 이민 1세인 교포들은 록키산맥에서 채취한 약효 없는 미국산 인삼을 고려인삼이라고 속여 팔았다. 또 집안이나 길거리에서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떠들어대거나 서로 싸우기가 예사였고, 옷차림도 말이 아니었다. 이에 도산은 먼저 교포들의 집 창문에 커튼 달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지저분한 세간이 밖에서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고함소리도 덜 새나가기 때문이었다. 또한 교포끼리 서로 감싸주고, 남을 속이지 않는 참된 마음을 가지라고 설득했다. 도산의 생활과 정신, 사상의 기반이 된 것은 이웃 사랑, 나라 사랑 등 사랑이다. 특별히 그는 동지애가 남달랐다. 독립운동 동지인 이갑(李甲)이 반신불수가 되어 만주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도산은 운하공사의 인부로 중노동을 하며 치료비를 마련했고 부인까지 삯빨래를 하며 몇 달만에 천달러를 만주로 보내주었다. 나라 사랑, 이웃 사랑으로 이처럼 온 몸을 바쳤지만, 가족들에게는 물질적 도움은 커녕 작은 선물하나 하지 못했다고 한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이듬해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귀국 했다. 귀국 후 신채호(申采浩), 이갑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고,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해나갔다. 1909년 박중화(朴重華), 최남선(崔南善)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 민족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던 중에 안중근의 이토 암살사건과 관련해 중국으로 망명하고, 3년 후 다시 미국으로 망명해 본국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실현하기 위해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興士團)을 창설했다. 3·1독립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방략(獨立運動方略)을 작성하고 연통제(聯通制)를 수립하는 등 미국과 중국, 시베리아에서 국내를 오가며 구국운동을 했고, 이와 함께 해외 곳곳에 교육기관을 세우고 신문을 발행했다. 한 때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며 이상촌 걸설을 꿈꾸지만, 1935년 4월 윤봉길 의사 사건으로 일제에 피검되어 수감생활을 하다가 2년 6개월만에 가출옥하게 된다. 이후 2년 뒤, 다시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연행되기 전까지 고향 근처 대보산 기슭 송태산장(松笞山莊)에서 보낸 시기가 그에게는 가장 평온했던 때가 아닐까 싶다. 목수를 불러 직접 집을 짓고, 칸칸으로 나뉘어진 쌀통 등 근검절약 정신과 과학적인 창의력을 동원해 생활용품을 고안해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는 이상촌 건설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은 사라지고 만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 12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난 도산은 경성대학 부속병원(현 서울대병원)에서 투병하던 중 다음해 3월 간경화증으로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사후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백년교육의 실천가요, 자기개혁과 사회개혁, 나아가 산업혁명을 부르짖으며 이상촌 건설을 꿈꾸던 도산의 60평생은 아직도 꺼지지 않는 민족의 등불이다.
자료출처 : 강남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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